석면 산업의 활황기에 자리를 잡아 대기업으로 성장한 금강 KCC와 벽산그룹
[에너지단열경제]안조영 기자
우리나라는 1930년대 중반 전국에 걸쳐 석면광산이 개발되었으며 2차 대전 중 일본은 군수물자 조달을 위해, 특히 해군 함정에 사용하는 석면 수요가 급증함에 따라 우리나라에서 다량으로 석면 생산을 시작했다.
이때 생산된 석면은 대부분 일본으로 수출되었고 일부는 국내에서 사용됐다.
해방 이후 석면 생산량은 급속이 감소하고 일부 명맥을 유지하다 산업의 발달로 석면 생산량도 증가하기 시작했다.
1978년부터 1983년까지 연간 1만 톤 이상을 생산하였으나 광맥의 빈약과 인건비 상으로 수입에 의존하게 됐다.
대표적인 석면광산은 백석면 광산인 충남 홍성 지방의 광천 석면광산으로 1944년 백석면 4815톤을 생산하여 우리나라 백석면 약 90%를 생산하였다.
당시 근로자 수는 1천백여명, 지역주민 약 이천 명 가량이 석면사업과 관련됐다.
1984년 광천 광산이 폐광될 때까지 우리나라에서 생산된 석면의 총 생산량은 14만5천톤이었으며 대부분 백석면이었다.
우리나라의 석면 사용은 일제강점기 때부터 서울 용산의 아사노 슬레이트 공장을 필두로 시작했으며 급속한 경제 성장에 힘입어 석면 사용이 급속히 증가했다.
석면 생산과 슬레이트 제조 이미 50년 이상 사용하였으며 석면 방직업과 브레이크 제조업은 34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석면은 크게 시멘트 제품, 마찰재, 조인트 시트, 방직 제품 등에 포함되어 얼마 전까지 다양한 분야에 사용되었다.
또 건축재로도 많이 사용돼 지붕을 이는 슬레이트는 물론 곳곳의 단열재로 이용됐다.
1976년 석면의 수입량은 7만4천톤에서 1995년 8만8천톤까지 꾸준히 증가했으나 급격한 증가 추세는 보이지 않다가 2009년 전면 수입 및 사용이 금지됐다.
석면 사용 금지 이후 1군 발암물질인 만큼 10여년간 해체 작업을 해 오고 있지만 워낙 사용처가 광범위해 많은 애로를 겪고 있다.
우리나라 학교와 공공기관은 물론 농가주택를 비롯해 오래된 주택은 무조건 석면이 있다고 할 정도로 많이 산재돼 향후 최소한 8조원 가량이 투입돼야 다 해체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우리
당시 많은 성장을 했던 회사가 있었지만 지금까지 국민들에게 알려져 있는 대표적인 두 개의 회사는 금강 KCC와 벽산그룹이다.
금강 KCC는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자회사로 1958년 서울시 영등포구 양평동에 설립한 금강스레트공업(주)이 최초의 태생 회사다.
1959년 정회장의 막내 동생 정상영씨가 대표이사로 취임해 본격적으로 회사를 키웠다.
슬레이트(스레트)는 시멘트 85%와 석면 15%를 혼합해 압축 성형시킨 후 경화시켜 만든 제품으로 얇은 두께로 만들어 당시의 지붕 재료로 판매 했다.
금강은 설립 초기부터 급성장하면서 1967년에는 국내 지붕재 시장의 30%까지 점유하게 됐다.
여기에 금강은 박정희 정권의 새마을 운동(1970년)에 힘입어 성장을 거듭했다.
당시 정부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추진에 따라 농촌근대화사업의 하나로 전통적 농가주택의 지붕 재료인 볏짚을 걷어내고 스레트를 사용케 했다.
전국 농촌 마을이 정부 지원을 받아 지붕개량을 시작하면서 금강은 사세가 더욱 확장돼 1973년 주식을 증권거래소에 상장시킬 정도로 커졌다.
우리나라 스레트산업에서 빠질 수 없는 회사 중 하나는 벽산그룹이다.
벽산그룹은 창업주인 고(故) 김인득 전 회장이 1951년 9월 부산에서 창립한 동양물산(주)으로부터 태동했다.
동양물산(주)은 영화배급업과 극장업을 겸하던 무역업체였다.
김인득 전 회장은 단성사와 중앙극장을 비롯해 전국에 100여개에 달하는 극장 체인을 이뤄 '극장 재벌'로도 불렸다.
김 회장은 일제시대에 경남 함안의 농가에서 태어나 마산상업학교에서 공부했다.
그는 일제시대에 금융조합(지금의 농협)에 취직해 모은 종잣돈으로 동양물산을 세워 외국영화를 공급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1952년 단성사를 매입한 뒤, 1956년 서울중앙극장을 인수하고, 부산 대영극장, 대구 만경관, 제일극장, 대전 중앙극장, 광주 동방극장, 전주 시공관 등을 잇달아 매입했다.
1959년에는 반도극장(피카디리)을 설립했다.
1958년 11월 (주)벽산의 모태인 대한스레트회사를 설립됐다.
대한스레트회사의 초기 주력 사업은 슬레이트를 만드는 일이었다.
1963년 제일스레트공업(주)도 인수했다.
대한스레트회사는 1971년 3월 대한슬레이트공업주식회사로 법인 등록했다.
벽산도 금강과 마찬가지로 박정희정권의 새마을운동의 농촌 지붕 개량사업을 등에 업고 급격하게 성장했다.
이듬해인 1972년 한국스레트공업(주)으로 상호를 변경하면서 주식을 증권거래소에 상장했다. 1975년 제일스레트공업(주)을 흡수 합병한 후 1977년 4월 진해공장을 준공하고 국내 최초로 석고보드를 생산 판매하기 시작했으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안조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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